[이슬람&무슬림] 카르발라 전투, 생생한 이야기 속으로
카르발라는 이라크 중부에 위치한 도시로, 바그다드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져 있습니다. 2015년 기준 인구는 약 70만 명입니다. 이 도시는 680년 카르발라 전투가 발생한 곳이자, 이맘 후사인과 알압바스 모스크가 있는 성지로 유명합니다. 시아파 무슬림들에게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과 함께 중요한 순례지로 여겨지며, 매년 수천만 명이 두 차례 순례를 옵니다. 특히 후사인의 사망일인 아슈라와 아르바인에는 각각 최대 800만 명과 3천만 명이 방문합니다. 카르발라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카르브(고통)와 발라(고난)의 조합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카르발라 전투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0여년 전.. 이슬람 세계는 분열과 혼란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이슬람 예언자 무하마드의 사후 몇십 년 동안, 이슬람 공동체는 다양한 정치적 불안과 분열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 가운데, 후사인 이븐 알리, 예언자 무하마드의 손자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싸우겠다는 결의로 일어섰습니다. 후사인은 당시 우마이야 왕조의 야지드 1세의 통치에 반대했습니다. 야지드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강압적인 통치를 펼쳤고,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만을 샀습니다. 후사인은 이러한 부당함에 맞서고, 이슬람의 원칙과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카르발라로 향했습니다.
680년 10월, 후사인은 약 70명의 충실한 추종자들과 함께 카르발라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진영을 꾸리고, 야지드의 대군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야지드의 군대는 수천 명에 달했으며, 철저히 무장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후사인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날 밤, 후사인은 자신의 동료들과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며 말했습니다. "만약 누군가 떠나고 싶다면, 지금 떠나도 좋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사인의 동료들은 그와 함께 남아 싸우겠다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카르발라의 모래는 피와 땀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후사인과 그의 동료들은 적군의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그들은 칼과 창, 활과 화살을 사용해 적군을 상대했습니다. 후사인의 형제 알압바스는 그의 곁에서 싸우며, "형님, 우리는 당신과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후사인의 동료들은 하나둘씩 쓰러졌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은 후사인은 적군에 의해 포위되었습니다. 그는 지쳐 있었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적군의 대장은 후사인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후사인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나는 진리를 위해 싸우고, 진리를 위해 죽을 것입니다."
후사인은 마지막 숨을 거두며,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슬픔과 동시에 희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미소 지으며 속삭였습니다. "우리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후사인과 그의 동료들이 모두 순교하자, 카르발라는 다시 고요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은 결코 잊히지 않았습니다.
수백만의 시아파 무슬림들은 매년 이곳을 방문하며, 후사인과 그의 동료들이 보여준 용기와 신념을 기립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세대를 거쳐 전해지며,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정의와 진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